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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몰락과 비운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이야기

by eunbiryung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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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중국이 근대화를 겪으며 청나라가 어떻게 멸망해갔는지 아시나요?

중국은 인구 순, 면적 순으로 보다 세계적으로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보나, 무시할 수 없는 대국이죠.

24년 국가별 인구 순위 통계를 보면, 중국은 인도에 이어 약 14억명의 인구 부자 나라에요.

이렇게 큰 국가가, 어떻게 '청 왕조'가 몰락해갔는지 궁금하실 거에요~

<벌거벗은 세계사: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 편(에피소드 149)>에 의하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는 3번이나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가, 3 번 다 퇴위했던 진기한 기록을 보유한 황제에요.

너무 귀엽지 않나요?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이기도 한 푸이는,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붕어하자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서태후가 푸이를 동치제와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태어난지 2년 10개월 만에 청나라 12대 황제 선통제로 즉위하였다고 해요. 

 

1908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08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로버 클리블랜드 파블로 데 사라사테 음양력 대조 일람[편집] 참고 문헌[편집] <!-- NewPP limi

ko.wikipedia.org

 

그 첫 번째가 '신해 혁명(1911)'으로, 푸이는 어린 아이인 3살에 즉위했다가, 6살에 퇴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물러나게 되죠. 너무 어려 그의 아버지인 순친왕이 섭정을 했었는데요.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를 총리대신에 임명하였고, 순친왕은 섭정에서 물러나야 했어요.

아마 첫 번째 황제 시절, 푸이는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가 퇴위한 사실 자체도 무엇인지 모른 채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거에요. 서양 문화를 동경한 귀여운 황제였던 푸이는 자신의 이름을 '헨리'라고 짓기도 했다네요. 

청왕조의 공식적인 멸망 과정은 아래와 같아요.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적극적으로 청 왕조 타도에 나섰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융유 황태후(隆裕皇太后, 1868년 ~ 1913년)에게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협박을 하였고 황족회의에서는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선기와 푸웨이(溥偉)는 푸이의 퇴위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황태후는 황제의 퇴위에 찬성하였다. 1월 30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난징 임시정부 측과 퇴위 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 2월 9일 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 조항 8개조가 확정된다. 청 황족에 대한 우대 조항 4개조와 만주족·몽고족·회족·장족에 대한 우대 조항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된다. 2월 11일 황태후가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2월 12일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제의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의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퇴위조서를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푸이는 황제에서 퇴위하였고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나라 황조는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출처: 위키백과: 청의 멸망과 황제의 퇴위)

<두 번째 즉위: 정사복벽과 자금성 출궁>

두 번째  즉위는 1917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규모 군벌이던 '장쉰'이 북경에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청나라 황실의 부활'을 시도한 사건이에요. 사실 이때에도 푸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개혁을 시도하던 군사정권에 이용당한 셈이죠.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아요.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에 선전 포고하는 문제로 대총통 리위안훙(黎元洪)은 총리 돤치루이(段祺瑞)와 권력투쟁을 벌여 돤치루이를 해임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을 따르는 각 성의 군벌들을 부추겨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을 선포시켰다. 리위안훙은 급히 장쉰(張勳)에게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와서 화해를 주선하도록 요구했지만 장쉰은 이를 기회로 푸이의 복벽(復辟)을 꾀했다. 장쉰은 3천명의 변자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6월 30일 자금성에 들어가 첸바오첸(陳寶琛) 등과 복벽 계획을 상의하고 사전에 청 황실에 이를 알렸다. 심야에 장쉰의 병력은 기차역과 전신국 등을 점령하였고 리위안훙에게도 협력할 것을 권유했다. 7월 1일 새벽, 장쉰은 청나라 조복을 입고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자금성에 들어가 푸이를 복위시켰다. 이후 각종 공화 제도를 다시 전제 왕정으로 되돌리려는 복고 정책을 반포하였다. 장쉰은 스스로 의정대신과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에 올라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였다. 복벽의 소식이 알려지자 쑨원은 상하이(上海)에서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각 성의 혁명당원에게 토벌할 것을 명령하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각지에서 복벽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장쉰을 토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리위안홍은 복벽에 협력할 것을 거절하였고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돤치루이는 일본의 재정지원을 받아 7월 3일 톈진(天津)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돤치루이는 장쉰의 군대를 단숨에 격파했고 장쉰은 급히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피하였다. 7월 12일 푸이는 다시 퇴위를 발표했고, 14일 돤치루이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정부를 장악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정사복벽)

 

1924년 군벌 펑위상의 참모였던 루쫑린은 쿠데타를 일으켜 자금성을 점령하고, 나름 평화롭게 지내던 푸이와 가족들을 자금성에서 내쫓게 됩니다. 3살 때 자금성에 들어왔던 푸이가 16년이 지나 떠나게 되죠.

쫓겨난 푸이를 받아주는 나라는 거의 없었어요. 영국 및 네덜란드는 새로운 중국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푸이의 보호 요청을 거절했고, 이러한 곤란한 처지의 푸이를 받아준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푸이를 여전히 청나라 황제 수준의 예의로 보호하겠다고 했고, 1924년 11월 푸이는 북경의 일본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만주국 건국과 집정 취임: 세 번째 즉위와 퇴위, 그리고 몰락>

 

1931년, 한참 일본이 대륙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던 시절, 일본 관동군은 당시 천진에서 자신들의 보호하에 있던 푸이를 만주로 데려와 '만주국'의 원수로 추대하고, 1932년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시켰으며, 1934년3월 푸이는 다시 세 번째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꼭두각시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마지막 황제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배하면서 1945년 8월 18일, 만주국의 해체와 동시에 황제로서의 지위를 내려놓고 퇴위하게 됩니다. 

만주국의 해체와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일 전쟁 등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아요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가 되었다. ..(중략)..

푸이가 황제로 즉위한 4년 후인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을 계기로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 상태에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제2차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의해서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아울러 연합국 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만주국의 종주국인 일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사이에 <일소중립조약>이 존재하여 만주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게릴라 공격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지만 평정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1944년 가을에 들어가면서 각 전선에서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후이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고, 8월 18일 푸이는 퇴위의 조칙을 읽어내려 만주국은 탄생한지 13년 만에 멸망한다. 

마지막 퇴위 후, 푸이는 전범으로 전락하여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었으며, 황후였던 완용도 아편에 중독된 채로 감방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전해져요. 비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네요.

 

푸이는 수용소에서 나온 뒤, 1959년 12월 4일 국가 주석 류샤오치의 전범에 대한 특사령을 받아서 12월 9일 푸이는 모범수로 사면되었어요. 1960년 1월 26일 중난하이에서 푸이는 총리 저우언라이와 회담하여, 석방 이후의 장래에 관하여 대화하였는데요

일반 시민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서 중국과학원이 운영하는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근무하게 되었어요.

"청나라의 황제였던 찬란한 과거를 보냈던 푸이는 결국 평범한 식물원 정원사로의 삶을 살게 됩니다."

평민으로서 푸이는 간호사인 리수센과 재혼하지만, 1966년 암에 걸려 1967년 10월 심장병과 신장암으로 사망했다고 해요.

1966년은 문화 대혁명 시대로, 암 치료도 거부되었다고 하니, 정말 비운의 황제가 아닐 수 없어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인생을 보여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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